창간 80주년

권력과 자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시민의 눈으로 기록해 온
경향신문 80년의 자랑스러운 발자취입니다.
창간 80주년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 출범



경향신문 주 5일 발행
유튜브 라이브 채널 ‘경향TV’ 출범
경향신문-독자 소통을 위한 ‘독자위원회’ 출범
경향신문 스타일북 발행
아티션 설립
공연 전시 온라인 매거진 <올댓아트> 운영
창간 70주년

창간 70주년 경향포럼'뉴노멀 시대 - 혁신과 통찰'

경향비즈n라이프를 경향비즈로 제호 변경
성완종 리스트 특종 보도

경향신문, 경향비즈, 스포츠경향 하이브리드 앱 자체 출시
경향 비즈n라이프 창간, 후마니타스 연구소 신설
디지털스토리텔링 ‘그놈 손가락’
디지털 지면보기 앱 ‘경향 뉴스진’ 출시
스포츠칸을 스포츠경향으로 제호 변경
공익제보사이트 ‘경향리크스’ 개설

위클리 경향을 주간경향으로 제호 변경
경향닷컴 흡수 합병
경향신문 모바일앱 출시
특별취재팀 '한국, 소통합시다' 민주언론상 수상
경향신문 지령 20,000호 발행

뉴스메이커를 위클리경향으로 제호 변경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3일 오후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됐던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을 찾은 시민들이 경향신문 호외를 읽고 있다.

신문 지면보기 서비스 실시, 경향신문 편집국 안종필 자유언론상 수상
7월 8일 경향신문 디지타이징 작업



새로운 섹션 "경향2" 발행

옥외 게시판 변경

스포츠칸 창간(현 스포츠 경향)

경향신문 인터넷 사이트 ‘언바세바’ 민주언론상 대상 수상'언바세바' 갈무리 화면

경향신문 편집경영 자문위원회 출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긴급보도한 경향신문 호외판을 읽고 있는 시민들

편집국장 임명동의제 도입
경영진의 편집권 불개입 입장 천명
독자들이 지면 제작에 참여하는 e옴부즈만 제 도입

경향신문사 미디어연구소를 (주)경향닷컴으로 분사, 신규법인 설립
편집국장 직선제 실시
경향신문사 뉴미디어부문을 미디어연구소로 통합
한화그룹에서 분리, 국내 첫 사원주주회사로 출범


10월 6일 경향월드넷 하루 평균 조회 건수 5백만회 돌파
4월 7일 제호 및 페이지 넘김 방향(오른편→왼편) 변경
경향월드넷(www.khan.co.kr) 출범 프로야구 현장중계 국내최초로 음성 서비스 실시
경향신문, 위클리경향, 레이디경향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 서비스 제공
정보사업본부 출범
매거진X 창간
광고 없는 1면 제작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현 주간경향) 창간
기자윤리강령 선포
석간에서 조간 발행으로 변경
한국화약그룹(現 한화그룹), 경향신문 인수
6월 19일 경향신문 기자, 언론자유선언문 채택

경향신문 노동조합 결성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북한 탈출사건을 다룬 경향신문 호외를 보는 시민

12월 15일 소년경향 창간( ~ 1988.09)

4월 14일 레이디경향 창간

‘문화방송’과 분리. 사단법인 경향신문 출범
이진희 사장 취임. 임직원 97명 면직 처리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 경영권 소유 / 소공동 시대를 마감하고 정동 시대 진입



주간소년경향 창간 (1969.9.1~1970.7)

기아산업 김철호 사장, 소유권을 넘기라는 이후락 비서실장의 요구를 받아 경향신문 주식을 신진자동차 측에 양도
연예주간지 주간경향 창간 ( ~ 1995.05.31)



서울민사지법, 경향신문 윤전기 경매
박정희 대통령과 동향인 기아산업 김철호 사장 단독 응찰
경향신문 공매 투쟁 결의 사설독자의 편지


경향신문 채권단, 경향신문에 채무 전액 일시 상환 통고
이준구 사장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박정희 정권이 1965년에서 1966년에 걸쳐 중앙정보부를 내세워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을 간첩 사건 연루 혐의로 구속한 상태에서 은행 대출금을 회수하여 강제로 공매 처분한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 악법 ‘언론유리위법’ 제정 반대 투쟁
독자의 편지


삼분폭리보도로 삼성재벌로부터 피소
재벌들의 ‘삼분폭리’ 비리사건 폭로

천주교재단 경향신문 매각, 주식회사 경향신문으로 재출범
2대 한창우 사장 12년만에 퇴진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 망명 특종 보도

경향신문 4월 28일자로 복간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 망명 특종 보도
자유당 정부, 경향신문 강제 폐간 (1950.4.30~1960.4.27)


여적 필화 사건
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여적’란에서는
미국 노틀담대학 허멘스 교수의 ‘다수의 폭정(暴政)’이란 논문을 인용하여 당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꾸짖었다.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 할 것이다.”
가장 강력한 야당지 경향신문을 손보려 벼르던 이승만 정권은 이 ‘여적’의 필자를 찾으려 사
상 초유의 신문사 압수수색을 강행했다. 폭력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필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여적 필화사건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자 주요한 당시 논설위원은 국회 기자실에 나타나 자신이 필자임을 당당히 밝혔다.

조·석간 정기 발행
본사 서울로 복귀

경향신문은 부산 피란 시절에도 발췌개헌안 파동을 전후하여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장기집권 기도를 강경하게 비판하고 나서 테러단 ‘땃벌떼’의 습격을 받는 등 반독재의 논지 때문에 정부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다.
호외 발행



6월 1일자
초대 국회의원 명단 및 사진 약력을 단독으로 게재해 제헌 국회에 관한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창간 11개월만에 발행 부수 1위 달성
| 신문이름 | 발행부수 | 논조경향 |
|---|---|---|
| 경향신문 | 6만 2천 | 중간노선 |
| 서울신문 | 5만 2천 | 극우 |
| 동아일보 | 4만 3천 | 극우 |
| 조선일보 | 2만 5천 | 우익 |
㈜1947년 조선 사정협회가 발행한 보이스 오브 코리아 11월호
해방 직후 우리 사회는 이념의 홍수 좌우익의
싸움판에서 초연한 논조는 양측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우익쪽에서는 '빨갱이 신문' 이라고 윽박질렀고 좌익쪽에선 '미군정 앞잡이 신문' 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중립노선은 당시 지성의 산물이었고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창간 11개월 후인 47년 9월 서울에서 발행된 주요 일간지의 발행부수에서 경향신문은 당당히
1위로 떠올랐다.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
1906년 프랑스 신부 플로리안 드망쥬가 창간한 주간 경향신문의 제호를 계승, 51명의 창간사원으로 출범한다.

"..인민은 어느 피리에 어느 정도⟨程度⟩로 춤을 추어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거니와 하물며 필진이 이에 추수⟨追隨⟩하여서 안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건국전후 초몽혼돈에 처하여 도의양심을 수완⟨手腕⟩에 옮기는 실천적 일개 행자로서의 신문인과 신문이 필요한 시기가 왔는가 할 뿐이다..."
